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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금 물고기》 르 클레지오 - 우리의 삶
    책/소설 2020. 10. 28. 05:48

    프랑스, 1997

      

    밑도 끝도 없는 질문 중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다. 나는 정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무의미하다. 나는 단지 나로 존재할 뿐이니깐. 성장은 나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받아들인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에서 주인공인 라일라는 정체성이 없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납치당해서 이름도 모른 채 타인의 손에 길러진다. 정체성의 부재는 라일라의 삶의 뿌리를 없앴다. 그래서 라일라는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못한 채 세상과 사람을 불신하고 부유하는 삶을 산다.

      

    나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고 싶었다.

      

    갈등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이 그렇듯, 그녀의 삶에는 그녀를 억압하는 사람도 있고, 그녀를 보살펴주는 사람도 있다. 세상을 부유하는 물고기처럼 사는 그녀는 갈등과 억압만을 보게 되었다. 이런 그녀에게 행복과 보살핌이 스며든다.

      

    라일라야, 너는 아직 어리니까 조금씩 세상을 알아나가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될 테고, 멀리까지 그것들을 찾아 나서게 될 거야.

      

    부유하던 그녀는 그렇게 스며든 행복과 보살핌을 통해 비로소 갈등과 억압의 뿌리인 정체성의 부재를 바라보게 된다. 정체성이란 단지 타자의 시선일 뿐이다. 그것이 그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규정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녀 자신조차도 이를 규정할 수는 없다. 정체성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고의 문제다. 그녀는 규정할 수 없는 정체성을 받아들인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지친 등과 가슴, 노랗고 잿빛이고 초콜릿빛인 그들의 살갗, 보랏빛 흉터가 난 아랫배와 정맥이 튀어나온 다리들을 곁눈질한다. 그런 행동을 통하여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오직 눈만으로 존재한다. 그러다가 나는 낮에 개 같은 놈에게 얻어맞은 입술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끼며 뜨거운 물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잠을 자지 않는다. 아니, 나는 눈을 뜨고 잠을 잔다.

      

    정체성이 삶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다. 정체성은 살아가는 과정 안에 있다. 그것은 고정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고정된 자기 자신은 없다. 물처럼 흘러가는 삶과 함께 나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렇게 변하는 모습이 때론 싫기도 하고 좋기도 하다. 싫은 나도, 좋은 나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이고, 삶이란 이런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행복과 보살핌으로 자신을 바라보게 된 라일라는 세상을 떠도는 물고기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물고기로 밝게 빛난다. 

     

    내가 원하는 것은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하기도 하고 매혹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내가 아니기도 하다. 나는 제자리에서 돌면서 옷감의 선명한 색깔과 반짝거림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라일라가 살아가는 삶에는 그러한 삶을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흘러가는 물을 헤엄치는 물고기는 수십, 수천, 수만 마리다. 그렇게 삶은 흘러가는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이제 나는 나 혼자만을 위하여 연주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다. 나의 연주는 나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 지하 거주자들, 자블로 거리의 차고에서 살던 사람들, 나와 함께 배를 탔고 발 드 아랑 도로를 자동차로 달렸던 이주자들, 더 멀리로는 강어귀에서 배를 기다리며 조만간 무엇인가가 자기들의 삶을 바꿔주리라고 믿는 것처럼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던 수이카와 타브리케트 천막촌의 주민들, 그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답도 없고 의미도 없다. 애초에 질문 자체가 틀렸다. 정체성이란 개인이 아니라, 나와 함께 흘러가는 삶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그 주체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우리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와 함께 있나?나는 그들과 함께할 수 있나?. 삶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드디어 나는 또 하나의 빌랄 족이 되어 부족의 시대에서 벗어나 사랑의 시대로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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