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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삶의 무게를 버티기
    책/소설 2020. 10. 30. 04:17

    미국, 1952

    자기계발서 열풍이다. 이 바닥의 고전 격인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부터 최근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이르기까지. 자기계발서 열풍에는 여러 원인이 있을 것이다. 경제양극화, 세대갈등, 취업난 혹은 외로움, 우울, 고단함 등등의 무게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삶의 무게는 결국 홀로 버텨내야 한다.​

     

    ​실존주의 철학은 개인의 의지를 최우선으로 한다. 현재 실존주의는 철학의 주류에서 완전히 밀려나있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세상에는 수만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학문적인 사실을 떠나 삶을 보았을 때 실존주의 철학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을 자신의 힘으로 버텨낼 수 있다면 혹은 그래야만 한다면, 굳이 남이 말하는 인생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외로우니깐 사람이다.’

     

    실존주의가 저물기 전인 1960년대, 헤밍웨이는 바다에서 홀로 낚시하는 노인을 그린 『노인과 바다』를 썼다.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였다. 그를 따르는 소년은 부모의 만류로 다른 배에 타고, 노인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홀로 먼 바다로 나가 낚싯줄을 멕시코 바닷속 깊이 내린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 이런저런 잡일들을 홀로 해가며 소년이 함께였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가, 적적한 마음에 라디오가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새를 보며 삶의 고단함을 생각하기도 한다. 동네 술집에서 꼬박 하루 동안 한 상대와 팔씨름을 하여 이겼던 시절이나, 부상을 견뎌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도 생각한다. 그리고 젊었을 때 아프리카 해안을 항해하다가 본 사자들을 떠올린다.

     

    그렇게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중 거대한 청새치가 낚싯줄에 걸려든다. 워낙 거대한 물고기라 낚싯줄을 잡은 노인의 손은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다. 청새치는 낚싯줄을 문 채 바다를 헤엄쳐 나가고, 노인은 버틴다. 청새치도 자신을 끌어올리려는 노인을 버틴다. 버텨내는 청새치와 이를 버텨내는 자신을 보며 노인은 청새치에 애정을 느끼고 그럴수록 반드시 청새치를 잡아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한다. 청새치와 노인이 서로를 버텨낸 지 이틀이 지난 후, 결국 청새치가 수면 위로 올라온다. 노인은 청새치의 아름다운 모습에 감탄하고 청새치를 고통 없이 죽도록 최대한 빨리 작살로 찍어 잡는다.

     

    노인은 죽은 청새치를 자신의 배 옆에 나란히 묶는다. 노인은 나란히 붙어선 청새치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만, 상어 떼가 청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다. 지칠 대로 지친 노인은 몇 번 상어 떼를 쫓아내려다 이내 포기한다. 깊은 밤, 상어 떼는 청새치를 남김없이 뜯어먹고, 노인이 홀로 탄 배에는 청새치의 거대한 뼈만 남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노인에게 소년이 달려온다. 노인은 집에 들어가 깊이 잠들고 소년은 노인의 배를 정리하러 가다가 거대한 청새치 뼈와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을 본다. 누군가가 청새치 뼈를 보며 상어 꼬리가 저렇게 멋있는 줄 몰랐다고 말하고, 소년은 사람들을 뒤로한 채 잠들어있는 노인에게 간다. 깊이 잠들어있는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실존주의의 한계는 개인의 의지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 치여 파멸한다. 노인은 청새치와 서로 버틸 때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작은 배에서 외롭게 버티는 노인처럼 청새치는 깊은 바닷속에서 외롭게 버텼다. 노인은 자신처럼 버티는 청새치에게 애정을 느꼈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어 떼를 증오했다. 그리고 청새치를 잡았다. 비록 상어 떼에게 뜯겨 뼈만 남았을지라도. 노인은 상어 떼에게는 파멸하였지만 청새치에게는 패배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파멸하였지만 자신에게는 패배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패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파멸할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청새치의 뼈를 보고 상어의 뼈라고 착각했으니깐. 그래서 노인은 사자 꿈을 꿀 수 있었다. 

     

    ​그런데 망망대해에서 홀로 버틴 노인에게는 새와 조 디마지오가 있었고, 청새치와 소년이 있었다. 노인은 새를 불쌍히 여겼고, 조 디마지오를 응원했으며, 청새치에게 애정을 느꼈고, 소년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사자들을 떠올렸다. 노인은 이들에게 의지하기보다 이들을 생각했고, 그래서 패배하지 않았다.

     

    홀로 버틸 수 없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듯이, 홀로 버티는 사람에게는 누군가가 함께할 수 있다. 삶의 무게는 결국 홀로 버텨내야 하지만, 그렇게 버티고 있다면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외로우니깐 사람'이면서 ‘사회적 동물’이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문장인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의 원래 문장은 ‘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로 직역하면 ‘노인은 사자들을 꿈꾸고 있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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