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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가벼움
    책/소설 2020. 10. 29. 04:15

    체코, 1984

    1968년 프랑스에서 무거운 근대적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혁명이 일어났을 때 체코의 프라하에는 소련군의 무거운 탱크가 밀고 들어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인생이 한 번뿐이라면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반복된다면 이는 굉장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스에 ‘68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체코에는 ‘프라하의 봄’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이 한 번뿐일지, 영원히 반복될지를 누가 알 수 있을까? 인생이 한 번뿐이냐, 영원히 반복되느냐는 형식에 불과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시는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Einmal ist keinmal)’며 의무로 점철된 무거운 삶 너머에 있는 개별적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한 여자에 얽매여 가장의 의무를 다하는 형식적인 삶에서 도망친 그에게 테레자가 찾아온다.

    테레자는 육체와 영혼이 하나가 된 개별적 자아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조롱한다. 영혼은 모두가 동일한 육체라는 형식에 갇혀있기 때문에 개별적 자아란 의미가 없다. 테레자는 어머니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토마시에게 의존하며 이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녀는 토마시에게 의존할수록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토마시에게 의존한다. 테레자는 토마시가 자신처럼 나약해지기를 원한다. 토마시는 이런 테레자가 부담스럽다.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녀를 동정하고 동정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나약함에 현기증을 느끼고 자신을 벗어나려는 토마시에게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이때 소련군의 무거운 탱크가 이들의 삶에 밀고 들어온다.

    토마시는 ‘프라하의 봄’ 때 공산주의에 협력한 사람들이 ‘난 몰랐어’라며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이들의 형식적인 말에 책임을 지라며 비판한다. 그리고 소련군의 탱크가 들어오자 스위스, 취리히에서 일자리를 제안 받는다. 테레자는 사진이라는 형식 속에 ‘프라하의 봄’이라는 내용을 담는다. 마치 육체라는 형식 속에 영혼이라는 내용을 담듯이. 그러면서 자신이 강해졌다고 느낀다. 그러나 소련군의 탱크와 함께 돌아온 체코의 지도자 둡체크의 나약함 때문에 모든 것이 변하게 되고, 테레자는 충분히 강해진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토마시에게 취리히로 떠나자고 제안한다.

    취리히에서 토마시는 형식에서 벗어난 삶의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그러나 테레자는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테레자는 ‘프라하의 봄’ 때 자신이 강해졌다고 느꼈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약했고 토마시에게 무거운 짐이 될 뿐이었다. 테레자는 토마시를 떠나 프라하로 돌아간다. 테레자가 떠나자 토마시에게 무거운 동정심이 형식적으로 찾아온다. 토마시는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를 되뇌며 그녀를 만나러 프라하로 돌아가고 도착하자마자 절망한다.

    프라하는 ‘프라하의 봄’이 소련 치하의 형식에 따라 괴상하게 바뀌어 있었다. 소련군을 혼란시키려 뽑아놓은 이정표에 소련의 이정표가 세워졌고, 체코인들이 찍은 침공사진은 비밀경찰에게 저항세력을 색출하는 자료가 되었다. 토마시를 만난 테레자는 토마시가 자신을 바오로 산에 보내는 환상을 가진다. 바오로 산에서 그녀는 세 사람에게 죽을지 살지를 결정하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이 산에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죽음의 순간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테레자는 자신의 나약함과 프라하의 나약함에 슬펐고 토마시의 강함이 두려웠다. 그녀는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구해주었지만 끝내 까마귀는 죽어버렸고, 육체만 존재하는 어머니의 세계에 대한 충동을 느낀다.

    프라하로 돌아온 토마시는 자신이 오래 전 버렸던 아들을 만난다. 아들은 그에게 체코의 학대받는 지식인들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기를 요구한다. 토마시는 처음에는 아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만 이내 이것의 형식적 무거움에 주저하게 된다. 그리고 생매장당한 까마귀를 끌어안은 테레자를 떠올리며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형식적 무거움, ‘그래야만 한다(Es muss sein)’를 초월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토마시는 아들의 요구를 거절한다.그리고 자신의 나약함에서 벗어나려는 테레자와 함께 프라하를 떠나 시골로 간다.

    테레자, 토마시와 함께 이들의 개, 카레닌도 시골로 간다. 카레닌은 토마시가 ‘프라하의 봄’ 이전에 고통스러워하는 테레자에게 준 개이다. 카레닌은 육체만 어미를 닮았고 머리는 그렇지 않은, 테레자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테레자와는 달리 카레닌은 항상 즐겁다. 이런 카레닌을 보며 테레자는 카레닌이 작은 크루아상 두 개와 벌 한 마리를 낳는 꿈을 꾼다. 크루아상과 벌은 형식이다. 잉태하는 것, 삶이 내용이었다. 카레닌은 병들었지만 여전히 삶의 의욕이 있었고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미소와 같았다. 테레자는 카레닌을 이해관계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안락사시킨다.

    테레자는 육체와 영혼의 합일에 갇혀 어머니의 세계에서 도망치려고만 했다. 이것이 형식이 되었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토마시에게 의존하는 것 또한 형식이 되었다. 형식에서 벗어나려는 형식이 테레자를 가두었고 나약하게 만들었다. 테레자는 카레닌의 미소를 통해 이를 깨닫는다. 테레자는 토끼가 된 토마시를 자신이 끌어안는 환상을 꾼다. 바오로 산의 환상에서 토마시는 테레자의 나약함을 다그치는 존재였지만 이제 테레자는 토마시를 끌어안게 되었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통해 형식의 무거움에서 벗어나길 기대했다. 테레자는 토마시를 통해 형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형식의 무거움을 기대했다. 이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의 개별적 자아를 찾기를 기대했고, 이를 찾아야 한다는 형식의 무거움에 갇혔다. 그리고 카레닌의 미소를 통해 토마시와 테레자는 형식의 무거움에서 벗어난다. 토마시와 테레자는 형식의 무거움을 감당하기에 나약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있다. 

     

    그는 플라톤의 『향연』의 유명한 신화를 떠올렸다. 옛날에 인간은 양성을 동시에 지녔고, 신이 이를 반쪽으로 분리해서 그때부터 서로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이야기는 행복과 슬픔이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이다. “아무런 요구 없이 타인에게 다가가 단지 그의 존재만을 요구하는 것.” 이들은 비로소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인생이 한 번뿐일지, 영원히 반복될지는 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이는 형식에 불과하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원제는 'L'insoutenable legerete de l'etre'로 직역하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슬픔은 형식이고 행복이 내용인 것처럼 존재는 형식이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내용이다. 우리의 삶은 사랑이 그러하듯이, 행복이 그러하듯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우리는 무거운 형식에서 벗어나 삶으로 내용을 채우려는 욕구가 참을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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