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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삶의 시작
    책/소설 2020. 11. 1. 04:36

    프랑스, 1942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제국주의가 한창 활개 치던 시절,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데려다 노예로 부리기도 했지만 ‘인간동물원’이라는 괴상한 곳을 만들어 그곳에 원주민을 전시합니다. 현대적 인권의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는 목적, 이유, 자격, 신분 기타 등등의 여러 가지 사람이기 위한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충족하지 못한 사람은 동물원에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들을 둘러싼 갈등은 제2차 대전에서 폭발합니다. 나치에게 유태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제에게 중국, 조선인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죽여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후 사람의 조건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무엇이 사람인가?’,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와 같은 기존의 것이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자체가 필요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실존주의란 사르트르에 의하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본질이란 앞서 말한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을 말하고, 실존이란 그 자체, 사람 자체를 말합니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은 사람이기 위한 조건은 없다는 것입니다.

     

    마이크를 예로 들면, 마이크는 음향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음향을 증폭시키지 못하는 마이크, 고장 난 마이크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마이크가 아닌 고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음향을 증폭시키는 것이 본질이고 마이크는 실존입니다. 그러므로 마이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섭니다. 존재의 이유, 본질이 충족되지 못하면 그 자체, 실존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실존주의 이전에는 이런 관점이 사람에도 적용되었습니다. ‘먼저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은 사람이 사람 그 자체, 실존으로 있기 전에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 본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이를 거부합니다.

     

    근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현대의 인권을 나타내는 실존주의에서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뀝니다. 사람이 존재하는 것에 수식어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사람일 뿐입니다.

        

    실존주의의 뿌리로 보통 니체를 꼽습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사람에게 사람의 조건을 부여하는, 본질을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니체는 이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신이 죽은 자리에 ‘초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초인이란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감당하는 힘을 추구하는 사람, 즉 본질 이전에 실존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니체의 사상을 세상은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존재의 이유, 목적, 조건을 부여해주는 신을 부정하고 단지 나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 허무(니힐리즘)하다는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인은 본질과 실존에서 방황하는 이방인에 관한 소설로, 사람들은 이를 ‘부조리’라고 말합니다. 부조리란 삶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인 뫼르소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의미 없이 받아들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담담하게 담배를 피우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애인과 놉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오늘이 아니라 어제 엄마의 장례를 치른 건 내 잘못이 아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쨌거나 난 토요일과 일요일을 찾아먹을 것이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판박이 일요일이라고 이제 엄마의 장례를 치렀으니, 다시 직장에 나가야 할 거라고, 그리고 요컨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뫼르소는 한마디로 패륜아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것이 패륜입니다. 실존주의의 관점에서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란 본질인데 그전에 실존이 존재하기 때문에 도리를 다하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한 조건, 이유, 목적을, 기존의 도덕을 반대하고 새로운 도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 자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뫼르소는 본질을 거부하려 하지만 세상은 이를 강요합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하였지만 세상은 신은 살아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이기 위한 조건, 본질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은 신, 본질 앞에서만 존재하며 이것이 없는 삶은 무의미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삶은 본질의 잣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이 신을 믿으며, 심지어 신의 얼굴을 외면하는 이들조차도 신을 믿는다고 말했다.......만일 그걸 추호라도 의심한다면, 그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자네 같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이들은 이 돌들의 어둠 속에서 신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는 걸 말일세. 자네에게 보라고 하는 게 바로 신의 얼굴이네”

     

    “제가 보기에, 그건 불행입니다.......불행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는 법입니다.......예, 알겠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게 그런 유의 불행을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신, 본질은 태양의 이미지로 나타납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 태양은 신을 상징하였습니다. 태양은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며 본질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거부하는 뫼르소에게 태양은 본질을 강요하는 억압일 뿐입니다. 태양은 시종일관 뫼르소를 괴롭힙니다.

     

    “법정에서 심리가 시작되었을 때, 밖은 온통 태양으로 가득했다.”

     

    “발이 내려져 있었지만, 햇살이 군데군데 스며들어서 실내 공기는 이미 숨 막힐 지경이었다.”

     

    뫼르소는 자신을 끊임없이 억압하는 본질에 반항합니다. 그리고 이는 태양과 물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해변에서 폭발합니다. 뫼르소는 해변에서 아랍인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이는 태양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질에 대한 반항이고 불행의 시작입니다.

     

    태양은 이제 짓누르는 듯했다.......나는 샘물의 속삭임을 다시 듣고 싶었고, 태양을 벗어나고 싶었고.......태양의 불길이 내 두 뺨을 엄습했고, 난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게 느껴졌다.

     

    햇빛이 칼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장검으로 내 이마를 찔러댔다. 바로 그때, 모든 게 흔들렸다. 바다가 깊고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하늘 전체가 온통 열려서 불비를 퍼붓는 것 같았다.......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모든 게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었다. 나는 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해하던 해변의 이례적인 침묵을 깨트렸다는 걸 깨달았다.......그건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짤막한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뫼르소가 본질에 반항하여 마주친 불행은 물로 상징되는 실존의 공허함입니다. 실존, 즉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의 전제조건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그 자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가능합니다. 부모님께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한다지만 부모님께 낳아달라고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은 없기에,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선택할 수 없기에 실존은 시작부터 이미 부정됩니다. 그래서 본질에서 벗어난 삶은 공허합니다.

     

    “타인들의 죽임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나와 무슨 상관이고, 그의 하느님이, 사람들이 택하는 삶이,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이 나와 무슨 상관이던가! 나 자신도 단 하나의 운명이 나를 선택하게 될 터였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내 형제라고 자칭하는 수십억의 선택받은 자들도 그럴 터이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알다시피, 삶이란 건 살만한 가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서른에 죽으나 일흔에 죽으나, 별로 다를 게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실존의 공허함은 물로 표현됩니다. 물은 그 자체의 색깔이 없고 단지 수동적으로 흘러내리기만 할 뿐입니다. 무색, 무취의 물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 실존의 공허함입니다.

     

    “이 모든 돌들이 고통의 땀방울을 흘리고 있네. 난 그걸 알고 있네. 난 번민에 빠지지 않고서 이 돌들을 바라본 적이 없네.”

     

    “하지만 그 이틀 동안 꼬박, 그 무수한 시간 동안 내내, 내 영혼에 대해 왈가왈부했던 그 모든 장광설 때문에, 난 모든 게 무색의 물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색의 물에 빠져 현기증이 나는 느낌이었다.”

      

    태양, 본질을 거부하다 물, 실존의 공허함에 사로잡힌 뫼르소는 결국 죽음을 맞이합니다. 뫼르소의 죽음은 본질에 반항한 결과이며 실존의 공허함에 맞닥뜨린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삶을 거부하는 죽음은 본질의 억압과 실존의 공허함에서 벗어난 최초의 선택입니다. 뫼르소에게서 죽음은 부조리한 삶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릴 수 있어요. 그런데 너무 빨리 가면, 땀에 흠뻑 젖거든요. 그래서 교회 안에 들어서면 오한이 나지요.” 간호사의 말이 옳았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선택받은 자들이었다. 오로지 선택받은 자들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역시 언젠가는 형이 선고될 것이다.

     

    나는 기쁨과 분노를 한꺼번에 터뜨리며 내 가슴속의 모든 것을 신부에게 쏟아 부었다.......그는 죽은 자처럼 살아가기에, 살아 있다는 것조차도 확신할 수 없었다.......하지만 난 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그보다는 훨씬 더 확신이 있었고, 내 삶과 다가올 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내가 옳았었고, 여전히 옳았고, 난 늘 옳았다.

     

    죽음에 임박해서,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을 터였다.

     

    뫼르소는 세상의 본질을 거부한 다른 사람(이인(異人))이며, 자신의 실존에서 소외된 제2의 사람(이인(二人))입니다. 그래서 뫼르소는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방인은 그 자신의 존재, 삶이 시작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난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는, 내게 남은 소원이 있었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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