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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의 노래》 김훈 - 그 서늘함이 눈물겨운 노래
    책/소설 2020. 11. 2. 04:44

    한국, 2001

     

    붓의 나라

     

    조선의 왕들은 독살을 우려하여 은으로 된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다고 한다. 조선은 고려, 삼국시대에 비해 외침이 적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왕은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다. 유교에서 이상적 국가는 왕이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국가다. 그리고 왕이 유교 이념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면, 신하들이 왕을 올바른 길로 이끈다. 그러나 현실은 신하의 뜻을 왕이 얼마나 잘 따르느냐이고, 결국에는 왕권과 신권의 권력다툼이다. 

     

    조선의 건국세력인 사대부들은 고려의 귀족들과는 다르게 부만을 축적한 계층이 아니었다. 학문으로 무장했고, 유교 이념에 충실한 조선에서 사대부들은 학문으로 왕보다 우위에 서서 왕을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갖출 수 있었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 건국의 핵심 인물이었던 정도전은 신권 중심의 정치를 주장했다. 왕에게 정도전은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고, 결국 이성계의 아들이자 왕에 오르는 태종 이방원에게 죽는다. 그러나 조선은 이미 유교 이념에 뿌리를 두었고, 이후 왕권과 신권의 갈등은 계속됐다.

     

    왕과 신하들은 유교 이념의 해석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갈등했다. 유교 이념으로 권력을 다투는 붓의 나라에서 왕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신하들이었다.

     

     

    왕의 붓

     

    왕권과 신권의 권력다툼은 신권이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면서 격화된다. 선조 때 갈등이 본격적으로 격렬해지는데, 서인과 동인 간 갈등은 왕권을 어떻게 자기 세력에 끌어들이느냐를 놓고 벌이는 권력다툼이었고, 그 다툼이 극에 달할수록 왕의 불안함은 커졌다.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에게 신하들은 자신을 일본군에게서 지켜주는 가장 확실한 아군이자 일본군을 죽이면서 권력을 키워가는 가장 큰 적이었다. 선조는 이들을 때론 치하하고 때론 죽였다.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은, 가장 큰 공을 세웠기에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고, 가장 큰 공을 세웠기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다. 왕은 신하에게 의지했고, 의지할수록 이들을 두려워한다.

     

    지난번 그대의 벼슬을 빼앗고 그대로 하여금 백의종군케 한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어질지 못함에서 생긴 일이거니와그리하여 오늘 이 같은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도원수 권률은 진주로 돌아온 김덕령을 체포해서 하옥했다.......그때 의병장 곽재우도 얽혀들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임금은 강한 신하를 두려워했다.

     

     

    신하의 칼

      

    유교 이념이 추구하는 것은 왕도정치다. 왕도정치란 힘이 아닌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를 추구하는 주체는 왕이다. 그리고 신하들은 왕이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군자로 다스리도록 왕을 보위해야 한다. 현실이 어떻든, 신하는 왕을 보위해야 하는 것이 조선의 정치 이념이었다.

     

    이순신은 선조의 두려움을 이해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왕을 무서워한다. 언젠가는 왕의 붓에 자신이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신하로서 왕을 지켜야 하고, 왕을 지켰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 이순신은 왕이 자신에게 의지할수록 그를 가여워하고, 왕이 자신을 두려워할수록 그를 무서워한다. 자신이 살려면 왕에게 칼을 겨눠야 하지만, 신하이기 때문에 왕을 베어낼 수 없다. 이순신은 신하의 칼로 베어낼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세상을 베어내려 한다.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임금은 강한 신하의 힘으로 다른 강한 신하들을 죽여 왔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 낼 수 없었다나는 그 한 문장이 임금을 향한, 그리고 이 세상 전체를 겨누는 칼이기를 바랐다......신의 몸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장수의 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공을 세운 사무라이들에게 그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주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땅을 줄 수는 없었다. 사무라이들의 권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공하여 얻은 땅을 사무라이들에게 나누어주기로 한다. 혹은 전쟁에서 성장한 사무라이들이 전쟁에서 죽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선조가 신하들을 두려워한 것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무라이들을 두려워했다.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왜란 중에도 당쟁을 했던 조선의 신하들처럼 임진왜란 중에 서로를 견제하였다. 이순신을 백의종군케 만든 사무라이들의 계략은 사실은 이순신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순신이 라이벌 사무라이를 죽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순신의 검명과 사무라이의 검명은 닮았다. 이순신은 조선의 신하 같은 일본의 사무라이들을 증오하지만, 이순신이 선조와 신하들의 적이듯사무라이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사무라이들의 적이다. 이순신과 사무라이들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었지만 이들의 칼은 선조를 위한 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위한 칼도 아니다. 이순신과 사무라이들은 장수의 칼로 서로를 베어냈지만 이들의 검명은 모두 공허하다.

     

    권률은 무섭게도 집중된 위엄을 가진 사내였다.......그는 정치 권력의 힘으로 전쟁을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물 위에서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며 파도처럼 달려드는 그 무수한 적병들의 적의의 근본을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죽음의 물결은 충()이나 무()라기보다는 광()에 가까웠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그때 나는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염()하고 싶었다.

     

    죽은 적 척후장의 검명(劍銘)인 모양이었다......‘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에 젖는구나’.......‘청춘의 날들은 흩어져가고, 널린 백골 위에 사쿠라 꽃잎 날리네.’.......내 칼에 새겨 넣은 물들일 염()자도 내 마음에 떠올랐다.

       

     

    아비의 칼

      

    유교 이념에서 왕과 백성은 군사부일체, 즉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다. 왕은 아버지로서 백성을 돌봐야 하지만 선조는 일본군이 한양에 도달했을 때 궁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궁에 불을 지르지만 선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순신은 아버지로서 왕이 해야 할 일을 한다. 신하로서 백성을 돌보려 하고, 장수로서 백성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아비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이순신은 자신의 아들인 면이 일본군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꿈에서 공포에 가까운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은 아들을 닮은 사무라이에 대한 동정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순신은 신하, 장수이기 때문에 아비의 칼로 자신의 아들을 닮은 사무라이를 베어낸다.

     

    어깨가 잘려나간 면의 몸이 개울창에서 일어섰다. 머리는 죽었는데 몸은 살아 있었다. 죽은 머리가 산 몸 위에 붙어서 건들거렸다. 면은 칼이 없었다. 

     

    면은 죽고 아베는 살아서 내 앞에 묶여 있었다.......살려주자, 살게 하자, 살아서 돌아가게 하자. 내 속에서 나 아닌 내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평양까지 점령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도였다. 그의 군대는 깃발에 붉은 십자가를 그리고 다녔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 중 고아가 된 조선인 여자아이에게 줄리아 오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양녀로 삼았다. 왜란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죽었고, 줄리아는 천주교도로 생활하다가 사망한다. 1972년 그녀의 유해가 서울 절두산에 묻혔다.

      

     

    붓과 칼

     

    조선의 왕과 신하는 유교 이념을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다. 이들이 붓으로 그리려는 선()은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왕도정치였고, ()으로 이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4대사화, 예송논쟁 등 왕과 신하 사이의 치열한 권력다툼이었다. 조선은 결국 칼처럼 휘두르는 붓에 물들어 망한다.

     

    이순신은 충으로 칼을 들었지만 그것이 선은 아니었다. 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이순신은 신하로서, 장수로서, 아비로서 아무것도 베어낼 수 없었다. 선조는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써 보내며 붓으로 이순신을 베어내려 한다. 이순신은 면사첩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머리맡에 두고 자며 왕이 아닌 적에게 베어지기를 바란다. 

     

    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 고 임금은 멀리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칼을 올려놓은 시렁 아래 면사첩을 걸었다. 저 칼이 나의 칼인가 임금의 칼인가. 면사첩 위 시렁에서 내 환도 두 자루는 나를 베는 임금의 칼처럼 보였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 나는 나의 충을 임금의 칼이 닿지 않는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적의 적으로서 죽는 내 죽음의 자리에서 내 무와 충이 소멸해 주기를 나는 바랐다.

     

    왜란 당시 사야가라는 사무라이가 조선에 귀화한다. 사야가는 일본의 전국통일 과정에서 히데요시에 맞서다가 투항하고, 왜란에 나섰다가 조선 상륙 며칠 후 투항한다. 그는 투항서신에 이 나라의 예의문물과 의관 풍속을 아름답게 여겨 예의의 나라에서 성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썼다. 사야가는 조총을 조선군에게 보급했고 이순신과 서신도 주고받았다. 조선에 자리잡은 사야가는 병자호란 때까지 조선군 장수로 활약한다. 그의 조선 성은 김이고 이름은 충()()이다.

      

     

    칼의 노래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일부러 갑옷을 안 입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당시 조정과의 관계를 보았을 때 사실상의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나 추측할 뿐이다. 이순신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했다지만, 그의 최후는 죽고자 하여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베어낼 수 없는 것에 칼을 겨누었다. 그래서 칼은 공허했고, 세상에 적들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 적들을 뒤로한 채 이순신은 그 서늘함이 눈물겨운 칼의 노래를 끝낸다. 

     

    오랜만에 갑옷을 벗은 몸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서늘함은 눈물겨웠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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