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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세 걸음》 모옌 - 국가의 위선적 도덕에 희생 당하는 중국
    책/소설 2020. 10. 28. 05:04

    중국, 1993

        

    모옌의 [열세 걸음]은 전체의 위선적 도덕을 위해 개인의 주체성을 희생해야 하는 중국의 현실을 카프카의 이 연상되는 다소 엽기적인 소재와 특이한 서술방식으로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다소설은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정체불명의 서술자가 분필을 씹어 삼키며 청자인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리교사인 팡푸구이는 수업 중 과로로 쓰러진다그러나 중국의 열악한 교사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라는 대의를 위해 죽은 사람이 되고그의 아내인 투샤오잉에게 귀신 취급을 받는다.

     

    장례미용사인 리위찬은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장례식장에서 시체를 당국의 입맛에 맞게 성형하는 일을 한다뚱뚱한 당 간부가 죽으면 인민에게 '열심히 일하는 당 간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그의 시체에서 지방을 제거하는 따위의 일이다.

     

    죽은 사람 취급을 받은 팡푸구이는 리위찬을 찾아가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동료교사인 장츠추가 되는 성형수술을 받는다장츠추가 된 팡푸구이는 장츠추 대신 학교에 나가 수업을 하고장츠추는 돈을 벌기 위해 담배 장사를 한다.

     

    한편 팡푸구이의 아내인 투샤오잉은 러시아와 중국의 혼혈인으로러시아와 중국의 사이가 좋을 때에는 엘리트 취급을 받았다그러나 둘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변변찮은 직업 없이 있다가남편인 팡푸구이가 죽으면서 토끼 가죽 벗기는 일을 한다.

     

    이처럼 소설은 팡푸구이장츠추리위찬투샤오잉 네 명의 개인이 중국이라는 전체가 강요하는 위선적 도덕에 희생되어가는 과정을 다소 엽기적인 소재와 내용으로 표현하고 있다그런데 이러한 소재와 내용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이를 풀어내는 독특한 서술방식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동물원 우리에 갇힌 채 분필을 집어먹는 정체불명의 인물인 서술자와 그 서술자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말하는 우리’ 두 명인데두 서술자의 관계는 “‘는 말했다라는 2인칭으로 표현된다. '서술자'의 이야기는 이를 들은 '우리'에 의해 '의 이야기로 바뀐다. ‘우리는 서술자의 이야기를 ’ 혹은 의 이야기가 아닌 의 이야기라고 하여 서술의 주도권을 뺏어오는 것이다. '서술자'의 이야기가 '우리'를 통해서만 서술되면서, ‘서술자는 자기 이야기의 주체도자기 이야기의 서술 주체도 되지 못한다개인을 상징하는 서술자의 이야기가 전체를 상징하는 '우리'의 시각에 의해서만 서술되는 것이다.

     

    라는 서술방식은 마치 '너는 어떻다'라는 말을 듣게 되면 실제 ''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그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과 유사한 것으로전체가 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폭력을 서술시점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이는 '서술자자신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서술자가 들은’ 이야기에도 적용되면서 그 효과가 보다 극대화된다.

     

    '서술자'의 정체는 다소 애매하지만 죽은 팡푸구이의 귀신 정도로 추측된다그 존재가 애매한 것은 팡푸구이가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니었고팡푸구이도 장츠추도 아니었기 때문이다팡푸구이의 존재 자체가 애매하기 때문에 서술자의 존재도 애매한 것인데이 팡푸구이로 추측되는 '서술자'가 투샤오잉리위찬장츠추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우리'는 이를 ''의 이야기라고 해버린다.

     

    '너는 삼십 초쯤 사양하다가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라는 문장은 '팡푸구이가 말하길 리위찬은 삼십 초쯤 사양하다가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라고 해야 한다그러나 이렇게 서술하면 서술의 주체는 팡푸구이가내용의 주체는 리위찬이 되어버린다이를 '우리'는 용납할 수 없다개인(팡푸구이리위찬)의 주체성이 전체(우리)의 주체성보다 선행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문장은 '우리'가 리위찬의 행위를 판단하는 것처럼 ''가 했다는 식으로 괴상하게 왜곡된다마치 당 간부가 뚱뚱하면 안 되기 때문에 그 시체를 개조하고팡푸구이가 죽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처럼.

     

    한편 서술자로 추측되는 팡푸구이는 투샤오잉리위찬장츠추의 이야기를 단지 소문을 듣고 이야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마치 그들 자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그들의 과거심리상태 등을 매우 상세히 말한다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모든 이야기는 팡푸구이의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암시가 소설 내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

     

    그런데 '우리'의 폭력성을 고려하면 그들(리위찬투샤오잉장츠추)의 진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아무리 '서술자'가 진짜를 말하여도 이는 어차피 '우리'에 의해 왜곡될 것이기 때문이다이야기가 진짜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팡푸구이가 진짜 어떤 존재냐가 중요하지 않는 것과 같다진짜 팡푸구이보다 '우리'의 도덕이 더 중요한 것처럼 진짜 이야기보다는 '우리'가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라는 독특한 서술 방식과 우리와 서술자의 관계로 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전체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다그러나 모옌은 이를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분필을 먹는 '서술자'의 모습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다그러나 이는 주체성을 회복하려는 처절한 움직임이고결말에서 이러한 행위는 '서술자'에서 '우리'로 확장된다.

     

    동물원 우리에는 '서술자'뿐만 아니라 '우리'도 갇혀있다개인의 주체성을 박탈하는 전체는 그 자체도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이는 개인을 억압하는 중국 당국이 사실은 그들 자체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따라서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것은 '서술자'와 '우리모두에 해당한다.

     

    소설의 제목인 '열세 걸음'은 러시아의 민담으로참새가 두 발로 폴짝 폴짝 뛰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내딛는 것을 보면 행운이 오지만 열세 걸음을 보면 모든 행운이 악운으로 뒤바뀐다는 것이다.

     

    '서술자'와 함께 동물원 우리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우리'는 '서술자'처럼 분필을 먹으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서술자'의 발걸음을 센다그 발걸음은 정확히 열두 걸음에서 멈춘다이를 통해 모옌은 개인을 억압하는 전체인 중국을 단지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중국이 그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열세 걸음]은 주체성을 억압하는 중국의 현실을 내용뿐만 아니라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탁월하게 표현한 소설이다그런데 이것이 과연 중국만의 현실일까소설에는 주체성을 잃어가는 중국의 현실로 공교육을 예로 든다대학 진학에 매몰된 교육방식으로 인해 학생들은 오로지 대학만을 최고의 목표로 하며교육과정도 입시에만 도움이 되도록 문과는 과학을 배우지 않고 이과는 역사를 배우지 않는다그런데 이는 한국의 현실과 너무나도 똑같지 않은가? '전체'의 위선적 도덕을 위해 '개인'의 주체성을 희생해야 하는 현실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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