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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 불완전한 삶의 가치
    책/소설 2020. 10. 28. 05:10

    독일, 1950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있다. 완전한 삶은 불가능하다.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이해한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완전한 삶이 있는 천국을 꿈꾼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하지만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완전한 삶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러므로 완전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리고 완전한 삶이 불가능하다는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에 희망이 있다.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지독한 모순은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긍정은 다시 한 번 완전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삶은 이처럼 무한히 뻗어나가는 연속된 불가능성들, 긍정과 부정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모순에 있다. 그리고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사람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에는 이처럼 완전한 삶의 연속된 불가능성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모순적 삶을 살아가는 니나와 슈타인이 있다.

     

    니나와 슈타인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한다. 그래서 니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의 죽음에 조금도 슬퍼하지 않고, 슈타인은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니나는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슈타인은 이를 아예 거부한다. 그래서 슈타인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니나를 사랑한다. 그녀를 통해 슈타인은 완전한 삶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니나는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기에 슈타인을 사랑하지만 받아들이려 하기에 증오한다. 그리고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에 슈타인을 떠나보내지 못한다. 니나와 슈타인의 삶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리고 이해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긍정과 부정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곳에 있다. 이런 점에서 둘은 닮았고 서로가 깊이 공감한다. 니나는 슈타인에게 할 수 있다, 이다, 하려고 한다가 아닌 할 수 있었다, 이었다, 하려고 했다라고만 하냐며 책망하지만 이는 그녀 자신에 대한 책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니나와 슈타인은 둘 다 이 물음에 침묵한다.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니나는 완전한 삶의 가능성 때문에 알렉산더와 퍼시 할을 사랑한다. 그러나 퍼시 할의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확인하고 그의 아버지가 이를 말했을 때 공감한다.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지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슈타인은 자기도 모르는 어느 순간 이를 받아들인다. 슈타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일과 학생들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워한 것이다. 그리고 니나는 그 순간 슈타인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결국 슈타인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만 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불가능성의 불가능성이 주는, 부정의 부정이 주는 희망을 확인하지 못하고 자살한다. 니나는 그토록 부정하던 안락사를 퍼시 할에게 실행하면서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불가능성의 불가능성, 부정의 부정이 주는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끝내 살아나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니나와 슈타인이 이처럼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에 집착하는 이유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다. 이들의 삶은 1930년대 독일에 놓여있다. 나치가 막 권력을 팽창하던 시기, 완전한 삶의 가능성이 거대한 권력 앞에 완전히 무너지던 때였다. 니나는 소설을 쓰며 본의 아니게 나치를 돕게 된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부정할 수도 없다. 나치를 돕지 않으려면 결과적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고, 이는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슈타인은 나치에게 핍박받는 유태인을 돕고 블랙리스트에 오른다. 그러나 슈타인은 정치적 활동에 깊이 개입하지 못한다. 니나처럼 그 또한 시대적 상황에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니나와 슈타인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이해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는다.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레트는 슈타인과 니나를 바라보며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에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면서 마르그레트는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연속된 불가능성의 모순에서 벗어나 긍정과 부정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이를 인간의 운명이라 생각하며 슬퍼한다. 그래서 그녀는 니나가 그녀의 삶을 상징하는 아이, 루트(독일어로 루트는 길이다. 길은 끊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상징한다.)와 헤어지고, ‘그 남자’(존재가 희미하기 때문에 역시나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상징한다.)가 찾아가자 니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워한다.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을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하는 그녀에게 삶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의 연속이 아닌, 불완전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만이 삶의 의미를 묻지 않는다.

     

    작가인 루이제 린저는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불완전하게 썼다. 슈타인과 니나의 정치적 활동을 깊이 있게 기술하지 않았으며, 니나를 찾아가는 '그 남자'의 존재 또한 애매하게 처리하였다. 아마 그는 니나가 가장 사랑했지만 그랬기에 그 존재감이 가장 없는 알렉산더일 가능성이 높다. 슈타인이 그가 죽었다고 했지만 한편으로는 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니나의 언니 또한 그 이름이 마르그레트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다. 이처럼 루이제 린저가 소설의 핵심을 불완전하게 처리한 이유는 삶은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이 끊임없이 교차하여 나오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결과에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닌, 삶의 의미를 묻지 않은 채 그것의 불완전함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불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완전한 삶의 가치는 완전한 삶의 불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삶 그 자체로 나아가는 것에 있다. 천국은 반만 행복한 실제적 삶에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의미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그 의미를 결코 알게 되지 못할 거예요. 그것을 묻지 않는 자만이 해답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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