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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V.S. 나이폴 - 완전한 절망책/소설 2020. 10. 28. 05:08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카리브 해에 위치한 국가로, 서구 식민지 개척시기에 원주민이 몰살당하여 전통적인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유럽인, 아프리카 흑인들을 주축으로 완전히 새로 건설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수탈에 집중한 영국의 영향으로 제대로 된 근대국가를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후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20세기 중반 흑인, 인도인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독립하였지만, 제대로 된 공동체 사회를 만들지 못하여 사회 전반에 도덕적 공백이 만연하게 되었다.
나이폴의 1959년 작 『미겔 스트리트』는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도덕적 공백을, 미겔 스트리트라는 사회에 사는 16명의 인간군상과 이를 관찰하는 한 명의 소년을 중심으로 하는 17개의 연작소설로 그려낸다. 미겔 스트리트는 도덕적 공백으로 인해 사기, 중혼, 절도, 폭행, 뇌물수수와 같은 부도덕이 만연하다. 그러나 이를 도덕과 부도덕으로 나눌 수 있는 주체인 공동체가 없기에, 부도덕은 시종일관 담담하게 스케치하듯 그려진다.
미겔 스트리트의 인물들은 부도덕에 저항도, 절망도, 분노도 하지 않는다. 부도덕이 삶의 일부로 깊이 침투하여 일상이 된 것이다. 절망할 수 없기에, 절망 자체를 모르기에 희망도, 분노도 없다. 『미겔 스트리트』는 그 부도덕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담담하기에 철학도, 메시지도 없다. 단지 도덕적 공백을 스케치할 뿐이다. 서술자인 소년은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떠나면서 비행기에 오르는 자신의 그림자가 마치 난쟁이가 춤추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지만 식민지의 정신적 공백을 겪은 소년은 아프기만 한 채 전혀 성숙하지 못하여 난쟁이로 남았으며, 그래서 떠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 된 것이다.
『미겔 스트리트』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는 물질적으로는 서구에서 독립하였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주체성을 갖지 못한, 완전한 공백으로의 식민지이다. 작가 나이폴은 식민지의 문제가 경제적 수탈이 아닌 정신적 공백임을, 그리고 그 정신적 공백인 완전한 ‘무(無)’를 일상의 담담한 스케치로 표현하였고, 이를 통해 서구 사회가 가한 식민지의 폭력을 인상적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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