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말테의 수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자기애
    책/소설 2020. 10. 28. 04:58

    오스트리아, 1909

     

    20세기를 전후로, 도시의 발달은 사람의 생활양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농경사회의 전통적인 시간, 공간 개념은 도시 속에서 재정립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도시의 불안과 우울은 농경사회의 것과는 그 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5단계로 나뉜다. 낮은 단계의 욕구는 가장 하위가 기본적인 의식주를 충족시키려는 생존의 욕구이고, 그 다음은 생존을 보장하는 안전의 욕구이다. 보다 높은 단계의 욕구로 3단계가 사람에 대한 애정, 소속의 욕구이고 4단계는 3단계에서 보다 발전된, 집단이나 스스로에게 인정받고 싶은 성취의 욕구, 마지막 5단계는 자아를 완성하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농경사회의 욕구는 생존과 안전의 욕구였다. 오래된 비디오에는 요즘 어린이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호환, 마마가 아니라......” 라는 말이 등장한다. 농경사회에서는 생존이 지금처럼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이 당시의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생존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위협은 호환, 마마 등의 자연재해였다. 따라서 농경사회의 위협은 뚜렷하였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은 공포와 절망에 가까웠다.

      

    그러나 도시의 발달로 생존과 안전의 욕구가 자연스레 해결되면서 사람들은 보다 고차원적인 욕구를 원하게 되었다. 3~5단계의 욕구들은 모두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공동체는 농경사회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농경사회의 공동체는 친족집단 중심이었기에, 최소한 3단계의 욕구는 기본적으로 충족이 되었다. 이에 익숙한 사람들이 상경을 하게 되면 3단계 욕구부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도시의 피상적 인간관계는 이들이 직면한 전혀 다른 차원의 위협이었다. 자연재해는 이겨내야 할 투쟁의 대상이지만 사람은 함께해야 할 애정의 대상이었다. 사람에 대한 애정은 애증으로 바뀌었고 위협의 실체는 부유하였다. 뚜렷한 문제도, 답도 보이지 않는 위협 때문에 사람들은 어두운 긴 터널을 통과하는 듯한 불안과 깊은 늪으로 서서히 빠져드는 듯한 우울에 사로잡혔다.

      

    이 같은 근대적 불안, 우울은 카프카의 변신,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등의 도시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근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담아낸, 일명 모더니즘 문학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여기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는 밑도 끝도 없이 우울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말테의 수기에는 근대적 불안과 우울을 담아낸, 전형적인 모더니즘 문학의 특징이 있다.

     

    근대적 불안과 우울은 먼저 도시의 피상적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깊이 없는 인간관계는 사람에 대한 불신을 야기하고, 이는 자신에 대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불안은 다시 불신으로, 불신은 다시 불안으로 이어지면서 불안은 점점 강화된다.

      

    엄청나게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지만, 얼굴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 누구나가 여러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변하면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엇이다. 그러니 이제 내게는 아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강화된 불안은 삶에 대한 공허함을 불러일으킨다. 병원에서 일괄적으로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근대적 죽음은 피상적 인간관계가 야기한 공허함이다. 죽음은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종결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내쳐지는 소외이고, 인간의 존재는 죽음을 통해 그 자신에게서 완전히 버려지는 것이다.

     

    사람은 닥치는 대로 죽는다. 자기가 앓는 병에 딸린 죽음을 죽는다(왜냐하면 사람이 모든 질명을 알게 된 이래, 여러 가지 죽음의 종말도 병에 속하는 것이지, 환자에 속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말하자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존재에서 완전히 내쳐지는 죽음에 대한 불안은 삶에 대한 우울로 이어진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이 자신을 소외시키는 것이라면 삶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근대적 불안은 말테를 깊은 우울 속으로 밀어 넣는다.

     

    모든 현실의 일들이 아무 의미도 없고, 그들의 인생은 마치 텅 빈 방에 있는 시계처럼, 어떤 것과도 연관 없이 그저 흘러가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피상적 인간관계가 야기한 사람에 대한 불안과 불신은 때론 괴상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유령에 대한 환상은 부유하는 존재에 대한 극단적 불안이고 공포에 가까운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포도주 잔을 아버지를 향해 들었다. 그때는 크리스티네 브라에가 막 아버지 의자 뒤를 지나갈 때였고, 나는 아버지가 자기 잔을 움켜잡고 무언가 아주 무거운 걸 들어올리듯 잔을 탁자 위로 한 뼘 정도 들어 올리는 걸 보았다. 그날 밤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 집을 떠났다.

     

    피상적 인간관계는 도시 생활의 가난과 함께 스스로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낡은 벽에 묻은 가난에서 말테는 존재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제일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벽 자체였다...... 해마다 서서히 변해 간 빛깔 속에도 그 생활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푸른색은 곰팡이가 낀 녹색으로, 녹색은 회색으로, 노란색은 낡고 썩어서 퇴색한 흰빛으로 변색되었다......마지막 벽만 남기고 나머지 벽들은 몽땅 헐려버렸다는 말을 이미 했던가?......그러나 맹세컨대 나는 이 벽의 존재를 알아차리기가 무섭게 달아나기 시작했었다. 그건 이 벽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이 끔찍하기 때문이다.

     

    유령으로 나타나는 피상적 인간관계와 벽으로 나타나는 가난은 말테의 불안을 우울로, 우울을 무기력으로 바꿔놓는다. 말테는 삶의 이유를 완전히 상실한 채 방향을 잃고 떠돈다. 말테는 도시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전형적인 근대적 불안과 우울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나는 내가 어느 도시에 와 있는지, 여기 어디쯤에 내 아파트가 있는지, 더 이상 걷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더 많이 인간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게 되었다는 거지. 하나의 달라진 세계, 온통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새로운 삶.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서,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워서 나를 다소 힘들게 하고 있어.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는 신출내기인 셈이지.

     

    그러나 말테의 불안과 우울에는 근대성 이면에 작가인 릴케 자신의 고백이 있다. 릴케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여자아이처럼 양육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길 원했고, 릴케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육군 실과 학교로 진학하지만 견뎌내지 못한다. 이처럼 릴케의 어린 시절, 왜곡된 가족 관계는 불안과 우울의 밑바탕이 되었다말테의 수기의 불안과 우울은 근대성이라는 거대 담론 외에, 한 인간의 내면적인 수기가 담겨있는 것이다.

     

    릴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테는 어머니에게 소피라는 여자 이름으로 불렸다. 본인의 정체성이 어머니에 의해 왜곡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어머니는 말테의 여동생의 죽음 이후 특유의 우울을 말테에게 흘린다. 문제는 말테는 어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말테는 어머니에 의한 불안과 우울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이 말테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하였다.

     

    당신께서 이 적막함을 도맡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놀라지 마라. 엄마다 당신은 무서움에 벌벌 떠는 어린이를 위해 밤새도록 적막함이 되어주신 강한 분입니다.

     

    , 말테야, 우리 모두는 그렇게 없어지게 되겠지. 나는 우리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살면서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설령 우리가 없어진다 해도 거기에 제대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어머니가 거기 누구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밖에서 소피예요 하고 대답하는 게 즐거웠다. 나의 작은 목소리를 계집애처럼 아주 부드럽게 내느라, 목 안이 간지러웠다.

     

    말테는 어머니와 함께 한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결코 좋지 못하다. 그러나 이를 쉽게 인정할 수는 없다. 어머니를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테는 나이를 먹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한편으로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해결책이 원천적으로 차단된 문제에서 말테의 불안과 우울은 그 실체를 잃는다. 말테의 심적 방황은 실체 없는 불안과 우울이고, 그 이면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의 추억이 다시 살아나기를 빌었고, 그것은 정말 되살아났다. 그 추억이 그때처럼 여전히 답답하며, 나이를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무도 아는 사람 없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트렁크 하나와 책 상자 하나를 가진 채, 사실 어떤 것에도 호기심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다......최소한 추억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그러나 누가 그것을 갖고 있나? 만일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해도 그건 땅속에 묻혀버린 것과 같다. 어쩌면 사람은 그 모든 추억에 다다르기 위해서 나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늙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기억은 말테의 현재와 미래를 사로잡는다. 자신이 사라져버린 어린 시절이 끝났다고 느꼈을 때 말테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도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불안과 우울은 미래에 대한 무기력으로 이어지고, 말테는 다만 가라앉기만 할 뿐이다.

     

    어린 시절이 지나가버렸다고 믿을 때마다 앞으로 다가올 인생도 동시에 없어져버리고 내게는 마치 납으로 만든 장난감 병정이 서 있기 위해서 바닥을 딛고 있는 것처럼 꼭 그렇게 느껴졌다.

     

    봄이 올 때마다 인생은 그 인형들의 팔을 벌리게 하고는 쓸데없는 희망을 불어넣어 마침내 어깨가 축 늘어지게 되었다.

     

    불안과 우울, 이것이 불러일으키는 무기력은 자기애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말테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사랑할 수 없다. 유년의 기억 속에서 자신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덥기도 하고 화도 나서 거울 앞으로 달려가 가면을 통해 내 손이 어떻게 움직거리는지 간신히 보았다......말할 수 없이 심하게 숨이 막힐 것 같아 어떻게 해서든지 가면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때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거울은 나의 얼굴을 들게 하여 하나의 그림을, 아니 실제로 살아 있는 이상하고 알 수 없는 괴물을 보여주었다......내 앞에 있는 이 크고 끔찍한 이상한 물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이 괴물 같은 사람과 단둘이 있는 게 무서워진 것 같았다......1초 동안 나는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쓸데없는 애착을 가졌다가 이제 그 괴물 같은 사람만 남아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애정은 애정을 하는 주체가 있어야 그 대상도 존재할 수 있다. 말테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인을 사랑할 수 없음에 대한 변명을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해 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찾는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금방 다시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보이지는 않아도 어떻든 그에 대한 말이 들리기만 하면 그것은 귓속에서 자라난다. 말하자면 부화되어 개의 코로 들어오는 폐렴균처럼 우리의 뇌로 밀고 들어와 그 속에서 파괴해 가면서 커져가는 경우를 보았다. 이런 존재가 이웃 사람이다.”

     

    말년의 아벨로네는 신과 은밀히 직접 교감을 나누기 위해 마음으로 생각하려고 했을 수 있다......그 편지가 여러 해 전부터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에게 보내려고 씌어진 것일 경우, 그 사람은 그녀의 변한 모습에 얼마나 괴로워했겠는가......그녀도 자신이 유령처럼 변하게 될까 봐 두려워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이처럼 말테의 타인에 대한 거리감은 단지 근대의 피상적 인간관계에만 기인한 것이 아니다. 말테에게 사랑은 자신의 유년의 기억, 기억이 있는 세월처럼 극복해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세월과 사랑을 극복한다는 것은 새로운 체험일지도 모른다. 꽃과 열매는 익고 나서야 땅에 떨어진다. 짐승은 서로 느끼고, 서로 맺어지고는 만족해한다. 그러나 신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우리는 완성될 수 없다......우리는 신을 채 알기도 전에, 신에게 벌써 기도드린다. 우리로 하여금 밤을 극복하게 해주십시오, 그 다음에는 질명을, 그러고는 사랑을 극복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그러나 말테는 차마 자신의 유년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유년의 기억에 기인한 말테의 불안과 우울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테는 돌아온 탕아의 이야기를 통해 은연중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다. 그것은 어머니가 준 사랑에 대한 원망이다.

     

    그가 어렸을 때 가족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다른 것은 몰랐으며, 가족들의 부드러운 사랑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나 소년이 되자 그런 습관을 버리려고 했다......그 당시 마음속으로 그가 바란 것은 무관심이었다......더 상쾌하게 아침을 느끼기 위해서, 숨쉬는 시간마저 갖지 않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왜곡된 사랑은 말테에게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심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왜곡된 사랑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말테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 당시 그는 어느 누구도 사랑받는다는 끔찍한 처지에 넣지 않기 위해서 결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얼마나 다짐을 했는지 훨씬 후에야 겨우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남김없이 빛을 비춰줄 여인을 만날 거라는 희망을 더 이상 간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의 가장 큰 비극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곧 존재의 뿌리가 사라짐을 의미한다. 불안과 우울, 그것이 주는 무기력과 공허함의 근원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어 존재의 뿌리가 사라진 것, 자기 자신이 소멸한 것이다. 그래서 말테는 존재의 뿌리를 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기를, 그리고 이런 자신을 누군가가 사랑해주기를 원한다.

     

    그의 존재의 뿌리에서는 결실의 기쁨을 주는 겨울을 이겨내는 단단한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내면 생활을 성취하는 데 완전히 몰두했다. 그는 모든 것에 그의 사랑이 깃들여서 자라나고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건너뛰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람의 발밑에 엎드려서 그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를 간청하는 몸짓을 했다. 그들은 놀라서 주저하면서도 그를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그 기괴한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그를 용서해 주었다.

     

    돌아온 탕아 이야기에서 나타난 말테의 고백은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고, 자신을 사랑하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자신의 말로 차마 표현하지 못한다말테의 수기에서 말테가 마지막으로 말한 고백은 궁극적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누군인지 그들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를 사랑하기가 정말 힘들게 되었다. 단 한 분만이 그를 사랑할 수 있음을 그는 느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말테의 수기는 말테의 내면 고백이다. 그러나 진심은 돌아온 탕아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말테는 어머니를 사랑해서 감히 자신의 진심을 고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릴케는 탕아를 빌린 말테처럼 말테를 빌려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원고의 가장자리에는 말테가 아닌 릴케의 글이 있다.

     

    사랑받는 것은 불타오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고갈되지 않는 기름으로 불을 밝히는 것이다. 사랑받는 것은 사라져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지속적인 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표에서는 1단계가 의식주고 최종단계가 자아실현이다. 그러나 1단계 이전의 욕구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뿌리가 없는 나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있고, 존재하는 자신이 있어야 비로소 삶이 있다. 자신의 삶 속에서 남을 사랑할 수 있다면 자아실현 또한 가능할 것이다. 결국 나를 완성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신에 대해 더욱더 불만족하며 지금 이 밤
    고독과 적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기력을 되찾고 자신을 조금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내가 찬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나를 굳세게 해다오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다오
    내가 이 세상의 허위와 부패로부터 멀리 있게 해다오
    당신, 나의 주인이신 신이시여, 제게 은총을 내려주시어 몇 줄의 아름다운 시를 쓰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내가 못난 자, 멸시해 마지않는 자들보다도 더 못난 인간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게 해주소서.
    _보들레르의 산문시 파리의 우울 속의 <새벽 1시>의 끝 구절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