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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 허무주의와 주체성, 외로움과 사랑
    책/소설 2020. 11. 8. 06:36

    일본, 1987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나오코: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줄래?
    와타나베: 언제까지나 기억할 거야. 내가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그녀가 왜 나에게 나를 잊지 마라고 말했는지,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물론 나오코도 알았다. 내 속에서 그녀에 대한 기억이 언젠가는 희미해져 가리라는 것을. 그랬기에 그녀는 나에게 호소해야만 했다. “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슬프다. 왜냐하면,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0. 뒤틀림 

     

    일본 정서의 두드러진 특징은 허무주의허무주의는 문학음악영화 등 거의 모든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일본 특유의 색채로 나타난다이러한 허무주의의 원인은 일본의 자기부정에 따른 주체성 상실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그 지향점은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을 추구한다는 탈아입구일본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였다그리고 이는 주체성 상실로주체성 상실은 허무주의로 이어지며 일본은 뒤틀리고 있다. 

     

    아무튼 우리 가족, 모두 좀 이상해. 어디 한군데가 조금씩 뒤틀린 거야.

     

    무라카미 하루키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뒤틀린 일본에 대해 말하고 있다소설의 배경은 1960년대 일본으로당시 일본은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에 점령당하여 서구문화가 들어오던 때였다그러나 일본은 이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다. ‘탈아입구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였고수용의 중심이 없었기 때문이다이러한 주체성 부재는 일본을 뒤튼다프랑스의 68혁명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전공투가 실패한 이유는 이것이 수입된 서구문화의 모방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대학 자식들 대부분이 엉터리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남한테 들키는 게 두려워서 벌벌 떨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 똑같은 책을 읽고 모두 똑같은 말을 늘어놓고 존 콜트레인을 듣고 파솔리니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거야. 그런 게 혁명이야?

     


    극우파 미시마 유키오와 극좌파 동경대 전공투가 동경대에서 토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하였다는 것이다.

     

    * 1968~69년 일본 사회를 뒤흔든 '전공투(전국 학생 공동 투쟁 회의)'는 극좌 성향의 학생 운동으로 도쿄대를 시작으로 퍼진 전공투는 기존의 권위주의에 반발한 프랑스 '68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전공투가 68혁명과 다른 점이라면 '자기 부정'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는 점이다. '자기 부정'에 대해 와세다 대학 투쟁에 가담한 구레 도모후사는 "출세를 위해서 학문을 하면 할수록 학문의 본래 의미로부터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자기 부정이다. 자기 부정은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긍정의 결과 출현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전공투의 자기 부정은 학생으로의 주체성을 잃어가는 현실에 대한 반발을 나타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자기 부정이 동시대 정반대편인 극우파에 서있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관점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였고, 전공투는 일본 학생이라는 개인의 주체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한쪽은 국가를 옹호하였기에 극우파였고, 한쪽은 개인을 옹호하였기에 극좌파였지만, 둘 다 주체성 회복을 강조한 공통점이 있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는 주체성을 잃어가던 1960년대 일본의 사회상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이처럼 국가와 개인이 모두 주체성을 잃어가던 당시 일본 사회를 그리고 있다.


     

    서구의 자본주의는 일본을 더욱 뒤튼다. 1960년대 일본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주체성의 부재로 일본사회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였다그래서 전공투에 가담한 학생들은 취업준비로 한순간 그들의 가치관을 버렸고교내 식당엔 몇 엔짜리 밥을 먹느냐에 따라 계층이 나뉘게 되었다국기 없는 국기게양대는 주체성의 부재에 따른 뒤틀린 일본을 상징한다.

     

    나는 일어나 창가에 서서 정원의 국기 게양대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깃발이 매달리지 않은 하얀 깃대는 마치 밤의 어둠을 찌르는 거대한 뼈처럼 보였다.

     

    청춘은 일본의 주체성 부재로 뒤틀린다일본이 주체성을 상실하였기에 청춘 또한 그들의 주체성을 상실한다주체성의 상실은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고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주체를 상실하는 것이다그렇게 타인과의 소통이 어려워지며 외로움에 사로잡히고허무주의에 젖어들며 정서가 뒤틀린다일본의 허무주의청춘의 뒤틀림은 소통할 대상의 부재가 아닌주체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이다.

     

    허무주의와 이에 따른 청춘의 뒤틀림에 대응하는 인물유형은 소설 내에서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뒤틀림에 사로잡힌 기즈키와 나오코뒤틀림에서 벗어나 중심을 잡는 혹은 잡으려는 나가사와와 레이코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와타나베와 미도리.

     

     

    1. 기즈키 & 나오코

     

    기즈키와 나오코는 뒤틀림을 공유하지만 주체성이 없기에 의지할 타인이 필요하다기즈키는 와타나베에게 의지하였고나오코는 기즈키에게 의지하였다그러나 뒤틀림을 이겨내지 못한 기즈키는 자살하였고기즈키를 잃은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하려 한다.

     

    언제나 자신을 바꿔 보려고 나아져 보려고 하다가 잘 안 되면 안절부절못하거나 슬퍼하거나 했어. 그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바꾸어야 하고, 그런 생각만 했던 거야. 불쌍한 기즈키.

     

    그러나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할 수 없다사랑할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할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나오코는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사랑할 수 없기에 외로움에 사로잡힌다외로움에 사로잡혔기에 사랑을 갈구하지만 주체가 없기에 사랑할 수 없다.

     

    나오코의 성행위는 사랑할 수 없음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는 처절하고도 절박한 몸부림이다. (레이코의 제자도 이와 같다.) 그러나 성행위는 문제의 대응이 아닌 반응에 불과하다결국 나오코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상실하며 기즈키처럼 자살한다.

     

     

    2. 나가사와 & 레이코

     

    나가사와와 레이코는 뒤틀림에 대한 대응이 각기 다르지만 주체성을 잡으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나가사와는 뒤틀림에 강하게 대응한다주체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이를 바탕으로 뒤틀린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둔다그렇게 그는 뒤틀림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는다.

     

    와타나베: 내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정말 몸이 부서져라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내가 뭘 잘못 본 겁니까?
    나가사와: 그건 노력이 아니라 그냥 노동이야. 내가 말하는 노력은 그런 게 아냐. 노력이란 건 보다 주체적으로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하는 거야.

     

    레이코는 뒤틀림에 부드럽게 대응한다한때 뒤틀렸던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며 자신과 타인에 대한 믿음으로 뒤틀린 세상에 순하게 녹아들려고 한다그렇게 그녀는 뒤틀림에서 자신의 중심을 잡으려 한다.

     

    자기도 이제 점점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게 된 것 같네. 우리에게도 아주 정상적인 부분이 있어. 그건 우리는 스스로 비정상이란 걸 안다는 거지.

     

    그 사람과 같이 있는 한 괜찮을 것 같았어. 그 사람과 같이 있는 한 내가 이상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지. 우리 같은 병이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감이야.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3-1. 와타나베      

     

    와타나베는 기즈키나오코처럼 방황하지만 핵심은 이들과 다르다그는 나가사와처럼 강한 주체성도레이코처럼 부드러운 주체성도 없지만주체성의 뿌리는 있다다만 그는 이를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기즈키나오코의 방황이 자신의 주체성 부재를 확실히 인지하였기에 한 것이라면와타나베의 방황은 자신의 주체성을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였기에 한 것이다그래서 기즈키와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의지하였고나가사와와 레이코는 와타나베를 믿는다.

     

    나오코: 너는 우리와 바깥 세계를 연결해주는 연결 고리 같은 의미를 띤 존재였어. 우리는 너를 매개로 하여 바깥 세계에 동화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거야. 결국은 잘 되지 않았지만.

     

    레이코: 마음을 잘 여는 사람과 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 같은 거. 자기는 잘 여는 사람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열려고 하면 열 수 있는 사람이야.
    와타나베: 마음을 열면 어떻게 되죠?
    레이코: 회복하는 거지.

     

    나가사와: 와타나베와 나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관심 있는 인간이야. 오만하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야 있겠지만.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는지, 거기에 대한 것 말고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어. 그래서 자신과 타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어. 내가 와타나베를 좋아하는 건 그런 점 때문이야. 다만 이 친구는 아직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니까 방황하거나 상처를 입기도 하지.

     

     

    3-2. 미도리 & 와타나베      

     

    미도리는 뒤틀림에 레이코처럼 부드럽게 대응한다무엇보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에나오코와는 다르게 타인을 사랑하며 외로움에서 벗어난다그렇게 미도리는 뒤틀림을 버티기에 와타나베를 사랑할 수 있다.

     

    미도리: 나는 살아 움직이는, 피가 흐르는 여자야. 그리고 난 네 품에 안겨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어.

     

    와타나베는 뒤틀림에 나가사와처럼 강하게 대응하려 한다무엇보다 그는 레이코와 나가사와, 그리고 미도리처럼 주체성의 뿌리가 있다그렇게 와타나베는 뒤틀림을 버티려 하기에 미도리를 사랑할 수 있다.

     

    미도리는 그녀 스스로 말했듯이 생동감 넘치는 여자애이고, 그 따스한 몸을 내 팔에 묻었다. 그래나는 미도리를 사랑한다. 그건 오래전부터 분명히 알았다. 나는 다만 그 결론을 끌면서 회피했을 따름이다.

     

     

    3-3. 와타나베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죽음으로 허무주의에 사로잡히고미도리의 사랑으로 주체성을 갈구한다그에게 나오코의 죽음과 미도리의 사랑은 주체성의 부재에 따른 뒤틀린 일본을 살아가는 두 가지 길이다. 허무주의와 주체성외로움과 사랑와타나베는 허무주의와 외로움으로 뒤틀린 곳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부른다. 와타나베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는 미도리는 일본이자 세상이자 자기 자신이다. 그렇게 와타나베는 살아가야 할 일본을, 세상을,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자신의 청춘을 살아내려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인지 모를 곳을 향해 그저 걸어가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아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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