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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토》 장 폴 사르트르 - 존재의 권리
    책/소설 2020. 11. 7. 06:27

    프랑스, 1938

      

    철학에는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의 관점과 도덕을 제시하는 지혜의 관점이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지식보다는 지혜의 관점이 강하다. 제2차 대전 종전 이후 실존주의는 철학계의 주류로 떠올랐는데, 이를 무너뜨린 것은 구조주의다. 실존주의가 지혜의 관점으로 접근하였다면 구조주의는 지식의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구조주의의 시대다. 구조주의는 후기 구조주의로 나아가면서 현대사회,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열었다. 따라서 사르트르가 『구토』를 통해 제시한 실존주의는 현대사회의 주요 흐름과는 다소 안 맞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식의 관점에서다. 지혜의 관점에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흥미로운 점은 사르트르의 『구토』에서는 구조주의적 관점이 소설 초반부에 나온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의 가장 명확한 차이점은 개별적 인간의 행위, 의식 등을 지배하는 것이 그 개별적 인간이냐 아니냐이다. 즉,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결정하느냐, 외부적 무엇인가가 결정하느냐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결정한다고, 구조주의는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구조가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구토』 초반부에서는 자신의 존재를 자신이 결정할 수 없어 방황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나온다. 한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집합이 만들어낸 사건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에, 인간의 주체성은 없고, 오직 외부적 대상에 수동적으로 끌려갈 뿐이다. 심지어 주체성의 부재는 그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나는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소외되었고, 그래서 철저하게 고독하다. 이러한 외부적 대상과 자신과의 결코 좁혀질 수 없는, 좁힐 수 없는 간극,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간극 때문에 ‘구토’가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부적 대상과 자아와의 간극을 제시한 것이 다름 아닌 구조주의다. 사르트르는 구조주의를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구조주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명확히 아는 듯하다. 물론 구조주의는 실존주의 이후에 나왔고, 사르트르는 구조주의에 의해 무너지긴 했지만 말이다.

     

    실존주의가 구조주의에 무너진 이유는 철학을 사람들이 지혜보다는 지식의 관점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지식으로의 구조주의가 지혜로의 실존주의를 무너뜨린 것이다. 지혜로의 실존주의는 『구토』 중반부 이후에 나타난다. 외부적 대상,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자신의 존재는 완전히 고독하다. 그리고 이러한 간극은 사실이다. 사르트르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무시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의 연속적 흐름에서 나타나는 사건에 자신의 존재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현재, 현재 시간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집중한다. 현존하는 자기 자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 자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모든 것들을 무시한다. 그래서 이치에 맞지 않고, ‘부조리’하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부조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이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부조리’하지만 이 또한 중요하지 않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 존재한다’이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것. 초반부의 ‘구토’가 외부적 대상과 자아와의 간극에서 방황하여 생기는 현기증적인 구토라면, 중반부 이후의 ‘구토’는 자신을 억압하고 구속하고 통제하는 외부적 대상을 무시하는, 이를 토해내는 구토다. 부조리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잃은 부정적 행위인 구토가 부조리를 무시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중심을 찾는 긍정적 행위로 나아간 것이다. ‘구토’는 일견 니체의 ‘초인’과도 같은 것이고, 사르트르는 이것이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라고 말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지식이 아닌 지혜의 철학이다.

     

    실존주의가 한순간 철학계의 주류로 빠르게 떠올랐다가 구조주의에 의해 사라진 이유는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말한 시대는 20세기로 ‘이념에 대한 이념의 투쟁’이 절정에 달하던 시대였다. 이념은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의 명제에 입각하여 이성을 극단으로 끌어올린 관념이다. 극단으로 끌어올려진 이성은 인간의 감성을 말살하였다. 개인의 가치관은 공동체의 이념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개인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없었다. 공동체가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이었다. 그렇게 공동체의 이념은 개인의 도덕을 파괴하였고, 그래서 히틀러나 나치가 아닌 독일인들이 유태인을 660만 명이나 죽였다.

     

    이처럼 극단으로 치달은 이성이 벌인 파괴적 행위에서 사르트르는 이성이 아닌 감성, 이념이 아닌 도덕, 지식이 아닌 지혜가 필요함을 실존주의로 말한 것이다. 앞서 구조주의는 자신의 존재는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구조가 결정한다고 보고 있고, 실존주의는 자신이 결정한다고 보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실존주의는 자신의 존재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부적 대상에서 벗어난 개인이라는 가치관은 내가 아닌 다른 모두에게도 적용된다. 모든 사람들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그들의 존재는 모두 가치 있다.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애정을 느끼는 ‘휴머니즘’은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 실존주의는 무너져가는 개인의 도덕, 감성, 그리고 지혜를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를 명확히 제시하였고, 그래서 사람들은 실존주의에 열광하였다. 그리고 제2차 대전이 끝나고, 혼란이 바로잡히며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히자 사람들은 다시 이성과 지식을 바라보았다. 실존주의는 ‘부조리’를 무시하였지만 구조주의는 그렇지 않았다. ‘부조리’를 거부하며 이치를 찾으려 하였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졌다. 그렇게 실존주의의 시대는 끝났고 구조주의의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철학적, 시대적 흐름의 한가운데 사르트르의 『구토』와 실존주의가 있다. 그리고 현대의 철학적, 시대적 흐름에 분명 실존주의는 벗어나있다. 그러나 거시적 흐름에만 삶의 방향이 있지는 않다. 사람들의 삶은 거시적이면서도 미시적이고, 지식과 지혜가 공존한다. 내가 나 자신의 존재감, 자존감을 잃었을 때, 내가 나를 정확히 알 수 없어 세상과 나 자신에게서 소외되었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절대적 고독에 사로잡혔을 때, 구조주의가 '설명하는 이성적 지식’들보다는 실존주의에서 '느껴지는 감성적 지혜’가 삶의 방향을 잡아가는 데 보다 긍정적일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닌, 그저 ‘나는 존재한다’는 것, 혹은 ‘나는 나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이 살아가겠다는 ‘의지’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를 추구하려는 ‘구토’는 삶을 버텨가고 이어나가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권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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